2009. 11. 22. 10:24

귀여운 여인

우연히 케이블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1990년도 작품이니 20년이 다 된 작품이지만, 지금 나오는 그 어떤 로맨틱 코미디에 비해서 떨어지지 않는다. 신데렐라 스토리의 극한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두 번째로 보게 되니 처음에 보지 못했던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1. 기업사냥꾼
기업의 청산가치보다 낮게 거래되는 우량한 회사의 주식을 매입하여 주가가 제 값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일반적인 가치 투자자의 접근법이다. 이 영화에서 리처드 기어는 주가가 제 값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기다리지 않는다. 어차피 지금 당장 팔아버려도 상당한 수익이 보장되고, 필요한 경우 사업이 정상화되기를 기다려 팔아버림으로써 더 높은 수익을 올릴 수도 있다.
개봉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인수합병이 그다지 활성화되어 있지 않아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을 뿐이지만, IMF를 겪으면서 인수 합병이나 기업 분할, 청산이라는 용어는 더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다. 만도기계가 그랬고, 외환은행이 그랬고, 쌍용자동차가 그랬다.
즉, 기업사냥꾼들이 우량한 기업을 한 순간에 날려버리는 짓은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는 행위인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 리처드 기어는 개과천선하여 건전한 가치 투자자로 변신하기는 하지만, 이런 변신은 백만장자와 길거리 여인의 사랑 만큼이나 어렵지 않을까.

2. 라트라비아타
리처드 기어와 줄리아 로버츠의 관계를 진전시키는 하루 동안의 데이트 장면. 두 연인은 옷을 차려입고 전세비행기를 타고 오페라하우스로 날아가 오페라를 관람한다. 줄리아 로버츠는 깊은 감동을 받아 눈물까지 흘리는데, 이 때 관람한 오페라가 바로 라트라비아타다.
파리의 아름다운 매춘부 비올레타와 귀족 알프레도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바로 그 작품. 줄리아 로버츠의 눈물은 단순한 예술적인 감동을 넘어, 동병상련의 아픈 심정에서 흘러나왔을 게다.

3. 신데렐라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말도 안되는" 로맨틱 코미디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와서 보면 이건 "1999년에 지그가 멸망한다는 소리 만큼이나 말도 안되는" 영화다.
신데렐라가 백마탄 왕자와 결혼하는 데에는 마법의 도움이 컸다. 하지만 줄리아 로버츠는 아무런 도움 없이 백만장자와의 연애에 성공한다. 물론 리처드 기어의 심리 상태나 호텔 매너저의 역할이 약간의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말이다.
신데렐라와 귀여운 여인 어느 쪽이 비현실적인지 생각해보면. 마법사가 등장하고 12시면 마법이 풀리는 설정은 신데렐라가 말도 안되지만. 왕자님의 초이스를 받기 위해 예쁘게 꾸미고 조신하게 행동했던 숫처녀 신데렐라가 결혼에 골인하는 편이 논리적으로 훨씬 설득력이 있지 아니한지?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이 영화는 무척 재미있고, 유쾌하고, 따뜻하다. 삶이 빡빡하게 느껴질 때, 로맨틱 코미디 한 편 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것도 때론 좋은 활력소가 된다.